2014. 10. 11. 03:08

2000년 호주를 여행하는 중, 에얼리 비치(Airlie Beach)에서 생긴 일.

 

늦은 오후에 에얼리 비치에 도착해서 이전 마을을 떠날 때 미리 예약해 둔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호스텔 리셉션을 통해 다음날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에얼리 비치 투어를 예약했는데, 때마침 가지고 있던 현금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호스텔 주인은 예약을 해 주면서 투어 비용을 다음날 투어 가이드에게 직접 지불하면 된다고 했다.

 

(배낭여행객들은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나 역시 현지 커먼웰스 은행(Commonwealth bank)의 계좌에 돈을 넣어 놓고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현금을 인출해서 썼다.)

 

다음날 투어는 새벽 일찍 시작하는 거라 돈을 찾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날이 이미 어두워졌지만 마을 구경도 할 겸, 호스텔 주인에게 ATM의 위치를 물어서 슬슬 걸어 나왔다.

 

저 멀리 커먼웰스 은행 지점과 ATM이 보여서 저기구나...하고 가는데, 가까이 갈수록 한 사람의 움직임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호주 원주민인 애보리진(Aborigine)의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마트의 카트를 가지고 은행의 유리벽을 힘껏 내려쳐서 부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은행은 경보도 울리지 않고 조용했다. 강화 유리라서 제법 튼튼해서 한번에 깨지지 않으니 계속 카트를 들어 내리치고 있었다.

 

모든 가이드북에서, 여행자와 호주 사람들의 얘기에서, 심지어 호주 방송에서도 애보리진은 사회에 문제만 일으키는 위험한 부족이었다. 어지간하면 피해가라고 권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이것은 위험한 상황이다. 심지어 은행 앞이고 저쪽은 폭력과 더불어 범법행위를 하는 중이다. 머리 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지? 저 아이가 나를 봤을까? 지금 확 뒤돌아 가면 저 아이가 어떻게 나오려나?'

 

'그냥 길을 가는 중이었던 양 자연스레 지나가까? 내가 은행 가는 길이었다는 것이 티나려나?'

(은행은 길 끝에 있어서 은행을 지나가면 반대편엔 아무 것도 없었다. 너무나 티나는 설정이 될 것 같았다)

 

'그냥 못 본 척 무시하고 조용히 돈 찾아서 가까? 근데 여기서 돈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바보같은 짓이겠지?'

 

고민하면서도 내가 겁내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조용히 한 걸음씩 가까이 가고 있었다. 머리 속은 복잡한 채로.

 

그 때.

그 아이가 나를 부른다. 헉. 나를 본게 분명하다.

 

그: 헤이~

나: 왜?

그: 넌 어디에서 왔니?

나: 한국

그: 오~ 한국! 반가워!! 우리 악수하자.

(손내밀어 악수했다)

그: 난 아시아 사람들이 너무 좋고, 특히 한국인들이 정말 좋아.

나: 왜?

그: 똑똑하잖아. 백인들은 유색인종을 너무나 무시해. 그런데 아시아인들, 특히 너희 한국인들은 유색인종인데도 똑똑하잖아. 그래서 백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잖아. 난 그게 너무 좋아.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스스로 백인들을 혼내주는 방법을 찾았어. 그게 이거야. 잘 봐.

(다시 카트를 들어서 은행 유리를 친다)

나: (너무 놀라서 거의 비명) 그만! 하지마!!

그: 왜? 난 백인을 혼내주고 있는거야.

나: 그만해. 이건 아닌거 같아.

그: 괜찮아

 

그 때 경찰이 왔다. 은행 자체에서 경보는 울리지 않았지만, 경찰서로는 경보 상황이 전달된 것 같았다.

그는 순순히 경찰차에 올라탔다.

 

그: (경찰차에 올라타며) 잊지마. 너희는 최고야!

나: (뭐라 할지 몰라) ... 고마워

경찰: 너 다치지 않았니?

나: 아니

경찰: 저 아이가 너를 위협하거나 폭력을 쓰지 않았니?

나: 아니.

경찰: 확실하니? 이제 괜찮으니 겁먹지 말고 솔직히 얘기해.

나: 전혀. 저 아이는 나에게 아주 친절했어. 정말 괜찮아.

 

경찰이 아이를 태우고 사라졌다.

멍하니 있다가 이제야 한숨 돌리고 정신 차리고 무사히 ATM에서 돈을 찾아 숙소로 돌아왔다.

 

그 아이는... 그저 자신들을 무시하는 백인의 시선이 싫어서 나름대로 소심한 1인 시위를 했다. 그리고는 곱게(?) 잡혀갔다.

심지어 백인들을 상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우리들을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백인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태생으로 인한 한계에 대한 한(恨)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그 아이는 범죄자였을까? 물론 은행을 부수는 행위 만으로는 충분히 범죄자였다. 하지만, 어린 그 아이가 왜 그런 행동까지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경찰도, 백인들도 한 번 쯤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다면 정상참작까지도.

 

나에게서 애보리진에 대한 편협한 시선을 날려보내 준 특별한 경험이었다.

 

 

+ 세상에 처음부터 위험한 사람은 없다. 편견을 버리고 사람과 사람으로 대하면 모두가 '사람' 그 자체일 뿐이다. 낯선 사람을 만났는데 나를 경계하고 있다는 티가 난다면 나도 절대 기분 좋을 리 없다.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냥 사람은 사람이다.

물론... 뒤돌아 생각하면 참으로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었는데 나의 타고난 인복이 제대로 한 몫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Posted by TravelGi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