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12. 02:38

2000년 호주 워킹홀리데이.


서호주의 퍼스(Perth)에서 시작한 여행이 3개월 쯤 접어들 때쯤, 돈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돈을 벌지 않으면 더이상의 여행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 무렵 호스텔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얻은 정보에 따라 카나나라(Kununurra)에 멈추었다. 농장이 많은 카나나라에는 일을 구하기 쉽다고 했다. 


카나나라에 내려서 일단 호스텔 2박을 예약했다. 2박이 내가 가진 돈으로 끊을 수 있는 한계였다. 청소와 관리 등 호스텔의 일을 도와주면서 숙박을 무료로 제공받는 경우도 있어서 3일째 되는 날은 그런 기회를 물어봐야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숙소를 정하고 기본적인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마트로 갔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도 막막하긴 해서 내심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마트로 가는 길에 길거리에서 한 달 여 전에 남쪽 맨지멉(Manjimup)에서 같은 숙소에 있었던 일본애를 만났다.


그: 어? 너?? 여기서 또 만나네? 반갑다~

나: 어? 너도 여기에 왔어?

그: 나 일찾아서 왔어. 돈 벌어야 해.

나: 너도? 나도 ㅎㅎ 반갑다.

그: A랑 B랑 같이 온거야? 아까 마트에서 걔네들 만났는데...

나: 그래? 걔네도 여기에 있어? 걔네 어느 숙소에 있는지 알아?

그: 응...xxx캬라반 파크에 있다 했어.

나: 고마워. 만나러 가봐야겠다. 넌 어디에 있어?

그: 난 yyy에 있어. 나중에 또 보자.

나: 또 보자.


A랑 B는 맨지멉에서 같은 숙소에 있었던 한국인 커플이다. 이후 헤어져서 각자의 여행길에 올랐다. 이미 워킹홀리데이 경험이 있었던 A가 여자친구 B와 같이 다시 와서는 중고차를 구입하고 텐트를 싣고 다니며 여행하는 중이었다. 차가 있는 덕에 기본적으로 쌀과 각종 양념들을 싣고 다니는 장점이 있었다.


마트 장보기를 끝내고 그 쪽 숙소로 찾아가서 그들과 반가운 재회를 했다.


나: 짜잔~ 여기에 왔구나~!!

그: 어?? 여기서 또 보네? 하하하... 반갑다...하하...

그녀: 우리 여기에 있는줄 어떻게 알았어? 신기하다 하하...

나: 아까 길에서 일본애 걔를 만났어. 걔가 너희들 만났다고 가르쳐줬어.

그녀: 그래? 우리도 아까 걔를 마트에서 보고 신기했는데... 하하...

그: 어디에 있어?

나: 나 aaa 호스텔. 그런데 이틀 끊었는데 돈이 떨어져서 더이상은 못끊어. 일 찾아야 하는데.

그: 너도야? 우리도 돈 떨어져서 여기서 어떻게든 일 해야해. 여기서 돈 벌지 않으면 더이상 움직이지도 못해.

나: 나도나도... 하하...

그: 일단 숙소를 이리로 건너와. 우리 오면서 한국 여자애 한 명 만나서 같이 있는데 걔 텐트에서 잘 수 있을꺼야.

나: 정말? 그럼 감사하지.

그: 돈은 얼마나 남았어? 먹을 것은 가지고 있어?

나: 얼마 안 남았어. 먹을 것은 아까 조금 샀고 커피 한 병 있고.

그: 커피 있다고? 콜! 우린 쌀과 양념있어. 우리 일 구할 때까지 일단 살림 합치자. 


그는 커피홀릭이었으나 돈이 없어서 기호품 구입은 보류당했다. 나는 커피 한 병을 들고 다니며 흐리게 타서 물 대신 마시고 있었다.

이렇게 딜이 성사되어 살림을 합치기로 했는데... 우리 셋이 가진 돈을 다 꺼내니 45불이었다.


한참 멍하던 우리. 모두가 웃고 말았다. 한참동안을 웃었다.


그: 돈도 없으면서 커피는 마시냐? 하하하.....  

나: 기름값도 없이 불안해서 어떻게 다녔냐? 하하하...


'함께'가 된 우리는 돈이 없어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고, 앞날이 걱정되지도 않았고 마냥 즐거웠다.

그 전 주에 불어닥쳤던 허리케인의 여파로 수확이 지연되어 한 주 동안은 일이 없던 덕분(?)에 캬라반 파크 내 수영장에서 하루종일 놀고, 마을과 주변의 자연을 즐기면서 여행도 할 수 있었다.


일 주 후, 카나나라에서 가장 큰 농장에 운좋게 일자리를 잡은 우리는 6주 정도 재미있게 일을 했고, 다음 여행을 위한 경비를 충분히 만들어서 떠날 수 있었다. 



+ 이후에도 몇 번 더 경제적 위기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옛 친구를 다시 만나든, 좋은 사람을 만나든, 좋은 기회를 만나든 위기 탈출의 방법이 언제나 하나 이상은 있었다. 절대 산 입에 거미줄이 쳐지지 않았다. 여행 초기에는 불안한 마음과 걱정이 컸는데, 산 입에 거미줄 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된 이후로는 그런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오히려 상황을 즐기게 되었다. 또한 신세지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고의 제약이 많았었는데, 여행을 통해 때로는 신세져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할 수 있을 때에는 도움을 주고, 필요할 때는 도움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 여행을 통해 배운 소중한 자산이다.

Posted by TravelGirl